터레인(Terrain)과 스노보드, 그리고 '덕크니컬'의 장비 미학
제 지인 중에 소문난 낚시광이 한 명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상 어종이나 낚시 환경에 따라 챙겨가는 낚싯대 종류가 정말 어마어마하더군요.
흔히 말하는 '장비빨'은 단순히 허세가 아니고 생각합니다. 취미를 더 진지하게 즐기게 하고, 성취감을 극대화하는 강력한 시너지 도구이죠.
스노보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설면의 상태, 즉 **터레인(Terrain)**별로 그에 최적화된 보드가 따로 있습니다. 물론 올라운드 보드 한 장으로 '땜빵' 라이딩을 할 순 있겠죠. 트루트윈 파크 보드로 후경을 잔뜩 주고 낑낑거리며 파우더를 내려올 순 있겠지만, 터레인에 딱 맞는 보드를 탔을 때의 쾌감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장비의 늪, 아니 보드의 늪으로 깊숙이 빠져들게 됩니다.
오늘은 '덕크니컬'의 관점에서 터레인별 보드 선택법, 그리고 특히 덕스탠스 양방향 라이딩(스위치/미러 카빙)에 특화된 장비들을 깊게 파헤쳐 보겠습니다.
한국형 터레인의 끝판왕: 정설된 압설(Groomed Snow)
대한민국 보더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환경은 단연 인공눈을 꾹꾹 눌러 만든 압설 슬로프입니다. 개인적으로 정설 상태의 '최강자'를 꼽으라면 역시 곤지암 리조트가 아닐까 싶네요. 사실 국내 여건상 이런 정설 슬로프 외의 대안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이런 압설 터레인에는 역시 '카빙'이 정답이고, 카빙에는 그에 걸맞은 전용 보드가 필요합니다. 카빙용 보드는 대개 **긴 사이드컷 레디우스(Radius)**를 가집니다. 이를 통해 활주 속도를 확보하고 더 크고 아름다운 호(Arc)를 그려내기 위함이죠.
전향각 라이더들이 해머헤드나 알파인을 선택한다면, 덕스탠스 보더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요? 일본의 대표적인 브랜드인 Gray, WRX, Rice28, Spread의 라인업을 살펴보면 답이 나옵니다. 이들의 보드는 해머헤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8m 이상의 긴 레디우스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특히 양방향 라이딩을 지향하는 덕크니컬 라이더에게는 Gray Epic, Rice28 RT7, Spread RD 같은 트루 트윈(True Twin) 모델들이 압설 카빙에서 발군의 성능을 보여줍니다. 반면 버튼(Burton)의 리더보드나 나이데커(Nidecker) 메가라이트 같은 서구권 보드들은 비교적 큰 레디우스를 가지고 있지만, 파우더보드이거나(노즈가 아주 큼) 여전히 일본의 스노보들보다는 레디우스가 짧은 경우가 많습니다.
키가 클수록 레디우스가 작으면 카빙 시 라인이 급격히 말리게 되는데(내도: Japanes - 内倒, English - Incline/Inward Leaning), 어쩌면 북미나 유럽 브랜드들은 정설된 압설에서의 정교한 카빙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지형지물 이용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 파우더(Powder)
한국엔 없지만, 한 번 맛보면 절대 헤어 나올 수 없는 중독성을 가진 터레인이 바로 파우더입니다. 나무 하나 없는 신설의 바다를 서핑하듯 떠가는 기분은 정말 환상적이죠.
이 분야의 대표적인 서구권 모델로는 Jones Hovercraft 2.0과 Lib Tech Apex Orca를 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에이펙스 오르카는 제가 장비 리뷰를 위해 즐겨 찾는 유튜브 채널 **'The Good Ride'**의 호스트, **제임스 비스티(James Biesty)**가 인생 보드로 꼽는 모델이기도 하죠.
일본으로 눈을 돌리면 스노보드계의 에르메스 혹은 페라리라 불리는 **겐템스틱(Gentemstick)**이 버티고 있습니다. 사실 겐템스틱의 전 라인업이 파우더를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중에서도 **만타레이(Mantaray)**와 TT 모델의 입소문은 자자합니다. 다만 가격이 T T ... (눈물 좀 닦겠습니다).
그렇다면 덕크니컬 라이더를 위한 파우더용 트루 트윈 보드는 없을까요? 제가 추천하는 모델은 Rice28의 TP8입니다. 트루 트윈이면서 레디우스가 커서 카빙 머신으로도 유명하죠. 일본의 전설적인 유튜버이자 **'P-can factory'**의 수장인 **타니구치 타카토(Takato Taniguchi)**는 인터뷰에서 "단 한 장의 보드만 가져야 한다면 주저 없이 TP8을 택하겠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2025-2026 시즌 동안 이구짱조차 본인의 시그니처 WRX를 잠시 내려놓고 TP8만 탔다고 시인했을 만큼, 그 범용성은 압도적입니다.
나무 사이의 스릴: 트리런(Tree Run)
트리런은 크게 리조트에서 관리하는 인공 트리런과 금지 구역을 몰래 들어가는 자연 트리런으로 나뉩니다. 두 곳의 결정적인 차이는 '나무 사이의 간격'입니다. 인공 트리런은 비교적 여유가 있어 사고 위험이 낮지만, 자연 트리런은 나무 간격이 매우 좁아 생존을 위한 라이딩이 되기 십상입니다.
트리런 보드는 기본적으로 파우더 보드의 맥락을 같이 하지만, 좁은 공간에서의 조작성이 생명입니다. 서구권에서는 Ride Warpig나 Lib Tech T.Rice Orca가 유명하고, 일본에서는 Gentemstick Hornet이 좁은 숲길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좁은 숲속에서 방향 전환이 자유롭지 못한 디렉셔널 보드 대신, 덕크니컬 라이더를 위한 양방향 대응이 가능한 모델을 찾는다면 Capita의 SB Powder Twin이 정답입니다. 이 모델은 압도적인 허리 폭 덕분에 평소보다 10cm가량 짧게 탈 수 있습니다. 물리적인 지레팔이 짧아지니 나무 사이를 통과할 때의 민첩성이 극대화되고, 트루 트윈이라 어떤 상황에서도 즉각적인 스위치 라이딩이 가능하죠. (역시 '덕스탠스 양방향 라이딩'은 궁극의 기술입니다)
공중전의 묘미: 파크(Park)
파크는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나뉩니다.
- 키커(Kicker) & 점프: 거대한 점프대에서 비거리를 즐기는 곳
- 지빙(Jibbing): 레일, 박스 등 기물 위를 미끄러지는 기물 타기
- 하프파이프(Halfpipe): 반원통형 구조물에서 반동을 이용해 높이 솟구치는 곳
이런 곳에서는 **높은 캠버(Camber)**와 트루 트윈 구조가 필수입니다. 높은 캠버는 점프 시 스프링처럼 작용해 강력한 팝(Pop)을 제공하고, 트루 트윈은 불안정한 착지 상황에서 보험과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서구권에서는 대니 데이비스의 영혼이 깃든 Burton Free Thinker나, 전 세계 파크의 교과서라 불리는 **Capita DOA(Defenders of Awesome)**가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일본 브랜드 중에는 Rice28 RT7, Spread LTA, Gray Genius가 파크와 카빙을 동시에 잡으려는 라이더들에게 최고의 선택지입니다. 다만 일본의 보드들은 서구의 보드들보다 비교적 큰 레디우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점프와 착지 시, 급하게 회전이 필요한 경우 몹시 불리합니다.
결론: 저의 원픽은 무엇일까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저의 원픽을 말씀드리며 마무리하겠습니다.
일단 정설된 압설은 한국 라이더에게 선택이 아닌 강요된 '필수'입니다.
그리고 저는 신설이 펑펑 내릴 때 구름 속을 날아다니는 듯한 파우더 라이딩을 사랑합니다. (눈이 온 다음날 신설을 라이딩하는 것이 구름 위를 날아다니는 것이라면, 눈이 펑펑 내리는 동안의 신설은 정말 푹푹 빠지면서 구름 속을 날아다니는 기분입니다)
그리고 트리런을 좋아합니다. 다만, 리조트가 안전하게 닦아놓은 인공 트리런 구역안에서의 트리런입니다. "너무 약한 거 아니냐"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정말 빽빽한 자연 트리런에서 한 번 넘어져 보면, 안그래도 하얀세상이 완전 하얗게 변하는 공포를 맛보게 됩니다. 몸의 반이 푹푹 빠지고 다리에 힘은 풀리는데, 나무 사이로 보드를 돌릴 기운조차 없을 때의 그 절망감...
제가 처음 니세코에 갔을 때 무심코 혼자만의 길로 트리런을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는 데 무려 1시간이 걸렸습니다. 당시 주머니에 있던 위스키 한 모금에 의지해 "힘내자!"를 외치며 보드 위에 반쯤 누워 서핑하듯 기어 나왔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그래서 압설 카빙, 파우더, 그리고 넓은 트리런까지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저의 최종 선택은 역시 Rice28의 TP8입니다. 제 영원한 스승인 타니구치 타카토 상의 원픽이기도 하고, 제가 덕스탠스 카빙의 벽을 넘지 못해 고생할 때 그의 영상 딱 하나 덕분에 '동전 줍기'에 성공했으니, 센세의 안목을 믿고 따라가는 셈이죠.
여러분도 여러분의 터레인과 라이딩 스타일에 딱 맞는 '인생 보드'를 만나시길 바랍니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더 흥미로운 덕크니컬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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